다시 시작이 올까?


"내게 누군가를 죽일 힘은 없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생각한다.
언젠가, 내게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고. 
그리고 그 사람을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고. 그렇다, 설사 사자가 덮친다해도.
결국 소중한 사람의 손을 찾아 그 손을 꼭 잡고 있기 위해서, 
오직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싱겁게 흘러가는 시간을 그럭저럭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요?" 

- 연애소설(가네시로 가즈키作) 中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뿐...

기도(prayer)

그리고

기다림(waiting for His sign)


이 블로그가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가는 것 같다.

홈페이지로 시작했을 땐..
내 생각을 펼쳐놓고 싶을 때 찾았던 공간,
아무 생각 없이 내 맘대로 지껄이고 싶을 때 찾았던 공간,
뭐, 그랬던거 같은데...

요즘,
뭔가 장문의 생각을 정리한다던지,
뭔가 이슈를 정리한다던지,
아무튼 뭐든 길고 있어보이게 정리할 때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네..

언젠가 누가 그랬지...
나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홈페이지에 올려진 글이라고
지금은 유효하지 않는 말이다.

앞으로 이곳을 어떻게 해야될까...? 흠



율법서의 시작
구약의 시작
성경의 시작
창세기....

그 창세기의 시작인 1~2장의 창조기사는 항상 과학과 충돌을 빚어왔고
무신론자의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창조과학자들은 무신론자의 공격을 막기 위해
창세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나갔지만
창조과학이란 것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는 공격과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진화론은 자연스레 무신론자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창조과학의 반대편에 서게 되었다.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
진화론을 배우면서,
창조과학은 허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적인 갈등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환경 앞에서
그것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뿐이지만...


최근에 누군가가 창조론에 대해서 의문을 던졌을 때,
크리스챤으로서 창세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그래서 창세기와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고 여러 글들을 읽었는데,
나름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트렘퍼 롱맨3세 저, IVP)

구약학자 롱맨 3세의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How to Read Genesis)"에서는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창조의 엿새가 현대의 많은 독자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과학적 연구는 세계가 오래되었으며, 우주는 엄청난 시간의 과정이을 거쳐 존재하게 되었고, 
인간은 이 과정에 비하면 비교적 나중에 생겨난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창조의 과학적 모델이 성경의 기술과 충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랬을까?
어떤 신학자들은 즉시 변증적 자세를 취하면서 과학적 모델의 타당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한 사람들은 창세기 1~2장의 해석에 관한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새로운 발견들을 창세기 기사의 진위를 재검토하는 기회가 아니라 전통적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를 재검토하는 기회로 사용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을 대충 읽어보더라도 히브리어 '욤'을 24시간의 하루로 이해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어쨌든, 24시간의 하루는 해와 달의 교대로 이뤄진다. 그러나 해와 달은 넷째"날"에 가서야 창조되었다.
-중략-
창세기 자체는 창조의 날들의 성격을 우리에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모호성은 우리가 이 구절에서 얻는 전체적인 인상, 즉 이 구절은 우리에게 창조의 과정을 말해 주는 데 관심이 없다는 인상과 맞아떨어진다.

롱맨 3세는 그의 책에서 창조 기사에서 창세기 네러티브는 창조의 과정에 대해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무신론 기자,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우종학 저, IVP)

나사(NASA)의 인정(Hubble Fellowship)을 받은 젊은 과학자인 우종학씨가 쓴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에서는 
창조 기사에 대한 복음주의 권 내의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내에서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창조 기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데,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문자적 해석. 
말 그대로 창세기의 표현인 첫째 날, 둘째 날의 '날'을 24시간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천지창조는 6일 동안 일어났다.

둘째, 창조의 골격(framework)을 보여주는 골격 이론. 
이 이론에 따르면 창세기 기사는 연대별로 쓰인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배열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은 시적 구조를 갖는데 첫 삼일과 두 번째 삼 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런 대칭적 구조를 안식이라는 주제를 위해서 사용했다는 것이 골격 이론이다.
즉, 창세기 기자는 창조와 안식이라는 주제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지, 시간적 순서를 전달할 의도는 없었다고 본다.

셋째, 창조 기사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으로 섬겼던 태양, 달, 별, 바다 이런 것들이 
참 신인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조기사의 주 목적이며
창조의 순서나 방법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의 주목적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설명하는 동시에 저자는 창조과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창조과학은 창조 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극단주의 적인 문자적 성경 해석의 전통에서 출발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창조 과학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과학계에서 인정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 방법론을 창조과학자들이 제시한 것도 아니다.
창조 과학이 담고 있는 과학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20세기 초부터 창조론 운동에 근간이 되어 온 
홍수지질학(Flood Geology)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홍수지질학이란 것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 홍수 사건을 가지고 지질 현상들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즉, 전 지구적인 홍수가 일어남으로써 지층과 화석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홍수지질학은 전혀 과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창조 과학은 흔히 유사과학으로 분류되곤 한다.



두 책을 읽으면서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옳은 게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럼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는 창세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이며 창조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자 신학자인 필립얀시가 그의 책에서 해답을 줬다.

필립얀시의 별미 성경여행(원제:Student Bible, 필립얀시 팀 스태퍼드 저, 요단)


진화론과 창조론의 견해 차이는 심지어 법정에서까지 비화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 견해 차이는 확실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우리를 창세기가 가르치고자 하는 중심 진리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유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창세기가 증언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원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헬륨 원자, 나선형 우주, 생물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창세기 1~3장은 "이것은 내 작품이다"라고 표시하는 예술가의 낙관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창세기는 과학책이 아니다.
창세기는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지구의 생물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혹은 진화하였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창세기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도, 그 반대로 창세기를 비과학적이라고 깎아내리며 무신론을 주장하는 시도도
모두 창세기를 잘못 이해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 것들이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떤 자연의 법칙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는 과학이 풀어야할 어쩌면 영영 풀지못할지도 모르는 숙제이다.


ps.
크리스챤이라면 어릴 때부터 창조론과 창조과학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을 것이므로 
유신론적 진화론 쪽의 주장도 한번정도 귀기울여 볼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 중간에 소개한 우종학박사의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IVP)를 읽어보면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최초로 31억개 유전자를 해독, 우리 몸의 지도를 완성한 세계적인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 김영사)를 통해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래 링크는 "신의 언어"를 바탕으로 쓴 프랜시스 콜린스와의 가상 인터뷰 기사인데 읽어볼만 합니다.
 

http://blog.naver.com/artkee?Redirect=Log&logNo=150079162088  - 인터뷰 기사가 스크랩된 블로그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10 - 언론사 홈페이지의 인터뷰 기사: 회원가입을 해야 볼 수 있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the skies proclaim the work of His hands(Psalms 19:1)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 전 하석주 퇴장후 1:3 패, 네덜란드 전 0:5 참패, 감독 중도 해임, 벨기에전 머리에 피가 흐르는 것보다 경기가 중요했던 이임생 선수의 투혼과 1:1 무승부....마음아팠던 그 시절... 이젠 추억^^

# 허정무 감독의 장점이 젊은 선수 발굴 능력과 뚝심이라고 한다면 
단점은 특유의 소심한 전술 수행, 보수적인 선발 구성, 짜임새 부족한 공격 전술 및 밸런스 부재, 최악의 선수 교체 및 교체 타이밍 등등 나열할게 너무 많지만 
이 모든 단점을 엎어버리는 그의 최고의 장점...그는 운장이라는 사실 
아르헨전 참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나이지리아를 이겨줘서 그가 살아날 수 있었고 
나이지리아 야쿠부 선수가 한국 문전에서 보여준 일대일 찬스에서의 자비로운 슛은 교체카드 실패로 동점골을 허용한 그에게 16강 진출을 선사하였다.
용장위에 지장, 지장위에 덕장, 덕장위에 운장이라는데 그는 타고난 운장, 16강에서의 그의 운을 기대해본다. 

#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가 안되는건
허감독이 염기훈을 너무 중용한다는 사실
월드컵 직전까지 부상으로인해 폼이 많이 떨어져있는 염기훈을 억지로 월드컵 엔트리에 넣었울 뿐만 아니라 
월드컵 매 게임마다 선발출장 시키고 있다.
스카이스포츠의 나이지리아 전 염기훈의 평점은 페널티킥을 내준 김남일에 이어 팀내 두번째 최하점수였단 사실은
허감독의 염기훈 선발이 판단 미스임을 말해주건만
뚝심의 허감독은 아마도 16강 경기에서 염기훈을 선발로 내보낼것 같다.

# 너무 말라서 뼈정우라는 애칭으로 언제부턴가 불리기 시작한 김정우
작년말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엄청난 활동력과 수비력, 기성용의 나몰라 수비무시 모드에도 팀의 밸런스를 지켜주는 커버 능력까지 대단함을 느끼고 있다.
상무 소속만 아니더라면 유럽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아쉽다는...

# 축협회장님의 병역 발언으로 조금 시끄러운 것 같은데...
그 중 WBC 4강도 면제 안해주는데 월드컵 16강 면제는 말도 안된다는 논리는 이해가 안긴다.
야구하는 몇 안되는 나라가 주도권을 잡고있는 WBC와 대륙,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예선부터 참가하는 월드컵은 규모 자체가 다르고 국가홍보효과도 훨씬 커서 비교대상이 안된다.
실제 올림픽 조차도 규모면에서(시청률, 마케팅 측면, 경제규모 등등) 월드컵보다 한수 아래인데 WBC는 더더욱 아래...
병역 문제는 민감한 사항이라 조심스레 접근하는게 좋을 것 같다.
완전한 병역면제보다 수준높은 해외리그에 뛰는 선수에 한하여 병역을 은퇴 이후나 30대 초중반 이후로 연기해 주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이 방법은 일부 타종목에도 적용가능할 듯...이벤트성 병역면제는 근본적 해결방법이 아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B조 첫 경기를 보면서
어쩌면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출전일지도 모르는 한국축구의 두 기둥에 대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


PSV 아인트호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영표, 박지성


그 옛 기억은 

PSV 아인트호벤에서 활약했던 시절도 아니고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이 가능케 했던 2002년 월드컵 시절도 아닌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이 운영되던 1999년에서 2000년까지의 일이다.

언론에 많이 알려져 있듯이 박지성과 이영표는 
인맥, 학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
그런 두 선수를 발굴해낸 사람은 다름아닌 현재 국가대표를 맡고 있는 허정무 감독...


1998년부터 만들어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당시 허정무감독은 3-4-3포메이션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나
3-4-3 포메이션의 중요 포지션인 윙백의 좌, 우 불균형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오른쪽 윙백에는 박진섭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활약하고 있었으나
그에 비해 왼쪽 윙백은 오른쪽에 비해 약하디 약한 자리였다.
허정무감독은 왼쪽 윙백에 여러 선수들을 불러다가 테스트 하였지만 기대이하였다.

1999년에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이 시작되었다.
당시 TV로 1차 예선 경기를 보았는데, 그날 경기는 좌, 우 윙백의 불균형은 없어 보였다.
친선경기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왼쪽 윙백 선수의 맹활약 때문에 왼쪽 측면이 오히려 오른쪽 측면보다 강해보였다.
그 선수는 그 경기가 올림픽 대표팀 데뷔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돌파력과 헛다리 드리블 등 보통 한국 선수들에게서 보기 힘든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자리는 더이상 약한 자리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건국대의 평범한 공격수, 각급 청소년대표에 한번도 발탁이 된적 없는 무명선수...
올림픽 대표팀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리며 갑자기 등장한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그 선수가 이영표였다.
나는 이영표의 팬이 되어버렸다.
시드니 올림픽 본선 첫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소위 말해서 스페인에게 발렸는데...-.-;
본선 첫경기에서 대부분의 올림픽 대표 선수들이 긴장으로 혹은 기량 부족으로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플레이로 유일하게 제 몫을 했던 선수가 이영표였다. 
이영표는 올림픽 대표팀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영표는 올림픽대표팀으로 데뷔한 지 4개월 뒤 
허정무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팀으로 데뷔하여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왼쪽 윙백/풀백을 책임지게 된다.



박지성의 경우는 이영표와 달리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평가전으로 한일전 두 경기가 열렸다.
1차전은 일본에서 열렸는데, 
당시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부재를 말끔히 해결해준  이영표가 부상으로 이탈해있었다.

허정무감독은 이영표에 이어 10대 나이의 박지성을 중앙 미드필더로 발탁한 상태였는데,
한일전을 앞두고 이영표가 뛰는 왼쪽 윙백에 박지성을 선발로 투입하였다.
이영표 대타가 무명의 신예라니...살짝 미더웠다.

당시 일본 올림픽대표팀은 이미 국가대표팀 에이스였던 나카타가 포함된 최강팀이었지만
우리 나라 역시 친선 경기에서 유럽 강호 체코를 이기는 등 최고의 전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축구퍁들은 일본에게 처참하게 패배할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1:4 참패...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최악의 경기력으로 TV를 보던 나를 비롯한 축구팬들에게 수모를 안겨줬고
이영표 대신 왼쪽 윙백으로 출전한 박지성은 일본 공격에 완전 털리는 등 최악의 모습으로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청소년 대표팀에 한번도 뽑힌적이 없었던 무명선수...
허정무 감독에 의해 어느 순간 갑자기 발탁된 선수 박지성에 대한 첫 기억은 한일전1:4 참패였다.


허정무 감독은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시절 박지성을 계속 중용하였다.
한번씩 보여주는 박지성의 크레이지한 공격력은 멋져보이기도 했지만
활약하는 모습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박지성을 중용하는 허정무를 욕했다.-.-;
당시 박지성이 속해있던 명지대 축구감독과 허정무가 바둑을 두는 친분을 이용하여 뽑힌 선수라는 
소문도 있는 등 박지성이 실력으로 올림픽 대표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이후 히딩크 감독도 허정무 감독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에서 박지성을 중용하였는데
그때도 일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히딩크가 박지성을 왜 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박지성이 모든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히딩크가 포지션을 변경하면서부터다.
수비적 성향이 강한 중앙 미드필더였던 박지성을 히딩크는 측면 공격수로 기용한다.
그것도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 유럽팀(잉글랜드, 프랑스)을 상대로 한 친선 경기에서...
당시 친선 경기에서 박지성의 숨겨진 공격력이 드러났다.
프랑스 전에서 골을 넣었다. 그것도 수비수를 제치고 멋지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월드컵 본선에선 16강 진출 분수령이었던 포르투칼 전에서 골을 넣었다.
측면 공격수 박지성의 재능은 이렇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히딩크의 포지션 변경으로 인해서...

이 포지션 변경은 J리그를 재패하고 네덜란드 리그 에레디비지를 정복하고 
현재 세계 최고 리그인 EPL의 최고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게된 원동력이 되었다.


이영표, 박지성의 무명 시절 발탁되었던 때를 돌아보면
현재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폐쇄적인 한국 축구 시스템에 의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매장될수도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당시에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팀을 맡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번 월드컵의 공격과 수비의 두 기둥은 없었을 것이다.


함께 지냈던 2년이 생각납니다.
힘들었던 시간이었지요.

누구도 꺾을 수 없던 고지식함과 고집
한번씩 상처를 주었던 혓날의 날카로움
2년간 그러지 않은 모습이 대부분이었지만
제게 남아있는 이미지는 따뜻함,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군요.

얼마전에 보았던
앙상한 몸, 숨 조차 쉬기 힘든 나약한 모습
강하게만 느껴지던 그 모습이 그리웠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할만큼 나약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평소의 고집이라면 절대 영접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았을테니까요.

세상에서 힘들었던 일들, 슬픔, 아픔 모두 잊어버리고
이제 하나님 곁에서 편히 쉬세요.


Thy word is...
          a lamp to my feet and a light for my path.
                                                      (Psalm 119:105)


공허한 메아리와 또 익숙한 낯설음이
끝이 없는 기대와 체념의 소모전이
잔인한 관계의 기술과 너무 얕은 감정의 깊이가
보이지 않는 수없이 많은 세상의 틀이 
나를...

어떻게 해봐요 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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