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 B조 첫 경기를 보면서
어쩌면 이번 월드컵이 마지막 출전일지도 모르는 한국축구의 두 기둥에 대한 옛 기억이 떠올랐다.


PSV 아인트호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영표, 박지성


그 옛 기억은 

PSV 아인트호벤에서 활약했던 시절도 아니고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이 가능케 했던 2002년 월드컵 시절도 아닌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이 운영되던 1999년에서 2000년까지의 일이다.

언론에 많이 알려져 있듯이 박지성과 이영표는 
인맥, 학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던 철저한 무명 선수였다.
그런 두 선수를 발굴해낸 사람은 다름아닌 현재 국가대표를 맡고 있는 허정무 감독...


1998년부터 만들어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당시 허정무감독은 3-4-3포메이션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나
3-4-3 포메이션의 중요 포지션인 윙백의 좌, 우 불균형이 문제가 되고 있었다.
오른쪽 윙백에는 박진섭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활약하고 있었으나
그에 비해 왼쪽 윙백은 오른쪽에 비해 약하디 약한 자리였다.
허정무감독은 왼쪽 윙백에 여러 선수들을 불러다가 테스트 하였지만 기대이하였다.

1999년에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1차 예선이 시작되었다.
당시 TV로 1차 예선 경기를 보았는데, 그날 경기는 좌, 우 윙백의 불균형은 없어 보였다.
친선경기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왼쪽 윙백 선수의 맹활약 때문에 왼쪽 측면이 오히려 오른쪽 측면보다 강해보였다.
그 선수는 그 경기가 올림픽 대표팀 데뷔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돌파력과 헛다리 드리블 등 보통 한국 선수들에게서 보기 힘든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자리는 더이상 약한 자리가 아님을 일깨워주었다.

건국대의 평범한 공격수, 각급 청소년대표에 한번도 발탁이 된적 없는 무명선수...
올림픽 대표팀 데뷔전에서 골을 터트리며 갑자기 등장한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그 선수가 이영표였다.
나는 이영표의 팬이 되어버렸다.
시드니 올림픽 본선 첫경기에서 우리 대표팀은 소위 말해서 스페인에게 발렸는데...-.-;
본선 첫경기에서 대부분의 올림픽 대표 선수들이 긴장으로 혹은 기량 부족으로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하고 있었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플레이로 유일하게 제 몫을 했던 선수가 이영표였다. 
이영표는 올림픽 대표팀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았으며 
이영표는 올림픽대표팀으로 데뷔한 지 4개월 뒤 
허정무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팀으로 데뷔하여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왼쪽 윙백/풀백을 책임지게 된다.



박지성의 경우는 이영표와 달리 첫 만남이 그리 좋지 않았다.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평가전으로 한일전 두 경기가 열렸다.
1차전은 일본에서 열렸는데, 
당시 올림픽 대표팀의 왼쪽 윙백 부재를 말끔히 해결해준  이영표가 부상으로 이탈해있었다.

허정무감독은 이영표에 이어 10대 나이의 박지성을 중앙 미드필더로 발탁한 상태였는데,
한일전을 앞두고 이영표가 뛰는 왼쪽 윙백에 박지성을 선발로 투입하였다.
이영표 대타가 무명의 신예라니...살짝 미더웠다.

당시 일본 올림픽대표팀은 이미 국가대표팀 에이스였던 나카타가 포함된 최강팀이었지만
우리 나라 역시 친선 경기에서 유럽 강호 체코를 이기는 등 최고의 전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축구퍁들은 일본에게 처참하게 패배할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과는 1:4 참패...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최악의 경기력으로 TV를 보던 나를 비롯한 축구팬들에게 수모를 안겨줬고
이영표 대신 왼쪽 윙백으로 출전한 박지성은 일본 공격에 완전 털리는 등 최악의 모습으로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청소년 대표팀에 한번도 뽑힌적이 없었던 무명선수...
허정무 감독에 의해 어느 순간 갑자기 발탁된 선수 박지성에 대한 첫 기억은 한일전1:4 참패였다.


허정무 감독은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 시절 박지성을 계속 중용하였다.
한번씩 보여주는 박지성의 크레이지한 공격력은 멋져보이기도 했지만
활약하는 모습이 그렇게 눈에 띄지 않아서인지 많은 사람들은 박지성을 중용하는 허정무를 욕했다.-.-;
당시 박지성이 속해있던 명지대 축구감독과 허정무가 바둑을 두는 친분을 이용하여 뽑힌 선수라는 
소문도 있는 등 박지성이 실력으로 올림픽 대표팀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이후 히딩크 감독도 허정무 감독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에서 박지성을 중용하였는데
그때도 일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히딩크가 박지성을 왜 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박지성이 모든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히딩크가 포지션을 변경하면서부터다.
수비적 성향이 강한 중앙 미드필더였던 박지성을 히딩크는 측면 공격수로 기용한다.
그것도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기 직전 유럽팀(잉글랜드, 프랑스)을 상대로 한 친선 경기에서...
당시 친선 경기에서 박지성의 숨겨진 공격력이 드러났다.
프랑스 전에서 골을 넣었다. 그것도 수비수를 제치고 멋지게...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월드컵 본선에선 16강 진출 분수령이었던 포르투칼 전에서 골을 넣었다.
측면 공격수 박지성의 재능은 이렇게 빛을 보기 시작했다. 히딩크의 포지션 변경으로 인해서...

이 포지션 변경은 J리그를 재패하고 네덜란드 리그 에레디비지를 정복하고 
현재 세계 최고 리그인 EPL의 최고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게된 원동력이 되었다.


이영표, 박지성의 무명 시절 발탁되었던 때를 돌아보면
현재 모습에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폐쇄적인 한국 축구 시스템에 의해서 빛을 보지도 못하고 매장될수도 있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만약 당시에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팀을 맡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번 월드컵의 공격과 수비의 두 기둥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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